저는 요리라고는 완전히 젬병인 사람입니다. 군대 다녀오면서 밥하는 걸 겨우 배운 수준이라면 요즘 시절엔 욕 먹을 각오는 하지만, 그런 사정이 있겠거니 이해하시고 그냥 재미로 읽어 주시면 고맙겠네요.
서울에서 가족들과 살다가 일 때문에 경북 구미에 내려온 지 7년쯤 되었습니다. 처음 1년 반 정도는 아침 식사가 가능한 호텔에서 지냈죠. 어느 날 군대 다녀온 아들이 아버지 보고 싶다며 구미에 내려왔다가 복학 기간이 많이 남아 함께 살게 됐는데 고등학생이던 막내아들이 형을 따라 내려와 세 가족이 함께 살게 됐어요. 나는 주로 밥을 했습니다. 아주 좋았죠. 그런데 취직한 아들과 대학 진학한 아들이 한꺼번에 서울로 가버리면서 나는 혼자 남았다. 아니 그냥 남겨졌습니다.
표류하다 무인도에 도착한 로빈슨크루소가 생각났습니다. 한강 밤섬에 떨어져 “단백질이 필요해”라던 그 김 씨 말이 농담이 아니었죠. 혼자 식당에 가는 것도 한두 번 아닌가요. 나로서는 공포 그 자체였죠. 공포랄 것까지야? 변명이 되진 않겠지만, 부엌이라곤 목마를 때 잠깐씩 들어가 본 게 전부인 나 자신이 너무 한탄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한탄이 공포로 바뀌는 데는 이틀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요리? 뭐 그냥 하면 되지 않나?”라고 생각하실 분들에게 이런 말이 도움이 되려나 모르겠어요. 우선 설거지를 하는데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답니다. 왜? 서툰 건 고사하고, 어느 정도 씻어야 깨끗해지는지 감이 없어 계속 씻게 됩니다. 결벽증도 좀 있는 것 같고요. 군대에서 혼 진짜 많이 났습니다. 찌개를 끓이면 두 숟가락 뜨지 못한답니다. 처음 보는 맛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인데요. 요리의 원리 자체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나를 먹여 살린 건 8할이 코로나였습니다. 나에게 이런 행운이 찾아든 것은 조상님들의 가호일까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요. 예전엔 포장지에 싼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던 배달 음식들이 식당 요리 수준으로 변했습니다. 그보다 거의 모든 메뉴 종류가 배달된다는 게 믿기지 않았죠. 그때 정말 감사함을 느끼면서 하루하루를 보낸 기억이 아직 감동으로 남아 있습니다. 코로나가 생존의 길을 터 주다니 세상에 그런 역설이 어디 있을까요.
이런 안도감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죠. 배달비 바가지까지는 내가 말할 처지가 아니겠지만요. 나의 무인도는 파라다이스 섬이 되었답니다. 메뉴별로 맛집을 골라서 광고지 묶음을 따로 만들었을 때 나의 심정은 승자의 그것이었죠. 그러나 그렇게 우연히 찾아온 행운은 그리 오래 나를 지켜주지 않았답니다. 코로나가 끝나갈 무렵이었을까요. 적어도 그들의 불친절과 일방통행식 횡포가 더해갈 무렵까지는.
나의 파라다이스 섬은 갑자기 삭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매우 아쉬웠지만, 그 횡포들을 여기서 말하진 않겠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만난 산적들 얘기는 좀 그렇지 않은가요. 나는 이미 또 다른 독립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좋아! 그런데 이제 무엇부터 시작하지?”
아이들이 떠난 지 6개월 후쯤으로 기억됩니다. 우선 배달 음식을 최대한 자제했답니다. 견과류와 선식들을 준비하면서죠. 전투식량을 챙기는 마음으로요. 이 상황을 감지한 딸이 자신의 온라인쇼핑몰에서 파는 식품류와 영양제 등을 보내왔습니다. 일단 생존 필수조건은 확보했다고 생각했지만, 결코 속(?)사정은 그렇지 않았답니다. 사람의 몸은 기름만 주면 움직이는 자동차가 아니니까요. 속이 메스껍거나 허한 느낌이랄까요? 아하, 몇 가지 음식을 돌아가며 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구나, 영양소만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잘못되었구나, 이걸 깨달았습니다.
배달 음식은 무조건 얼큰한 것으로 바꿨습니다. 그게 대수일까요. 그럼 뭐가 더 필요할까요? 생각해 보니 알겠더군요. 과일과 오이, 당근처럼 요리하지 않고도 먹을 수 있는 무언가를 잔뜩 삽니다. 역시 그것도 아니었죠. 바나나가 곪아 나가고, 오이가 버려질 때쯤 간간이 먹는 배달 음식 역시 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제 집밥에 도전해야 합니다. 승산은 거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요. 그래도 선택지가 없는 도전은 그 자체로서 충분히 매혹적이지 않은가요.
궁여지책(窮餘之策)이란 이럴 때 딱 맞는 말입니다. 어머니를 비롯해 가까운 분들에게서 반찬들이 답재했습니다. 이제 밥만 잘하면 되는가 생각했으나 그 역시 만족스럽진 않았습니다. 그 무렵 자연스럽게 견과류, 과자류 중에서도 간식용, 과일과 야채류가 다양한 종류로 준비되고 있었겠죠. 평소엔 눈길조차 가지 않던 식품류 매대에서 한참씩 머물게 된답니다. 그렇구나. 더 많은 종류의 음식을 조금씩 사게 됩니다. 그리고 나는 간단한 요리에 도전했습니다. 욕심은 내지 않았답니다. 해 본 경험이 있는 간단한 찌개나 두부무침 정도였죠. 그러나 나로서는 결코 작은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워낙 젬병이라 요리에 재미를 느낄 여유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도전정신과 탐구욕만으로도 망설임 없는 손길을 보며 나 자신이 많이 놀랐죠. 라면에 온갖 재료들을 넣어 끓여도 보았습니다. 버섯 세 종류와 파, 계란 같은 잡다한 재료를 다 넣었더니 아주 별미였습니다. 별미란 처음 보는 맛, 이런 뜻입니다. 김도 넣고, 참치도 넣어 보고, 나로서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실패가 대수냐고요. 이러다 완전히 새로운 라면 요리가 나올 수 있겠다는 턱도 없는 기대감을 나 혼자 가져 보기도 했답니다. 워낙 무모한 도전이었다 보니 그냥 혼자 그랬다는 얘기죠.
아직 잘하는 게 밥 말고는 없지만, 내가 홀로 살기에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이유는 따로 있답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여러 가지 선택지를 마련해 두었다는 거죠.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 몸이 지금 뭘 먹어야 할지, 뭘 먹고 싶은지를 안다는 데 있는 거죠. 그리고 내 영역 안에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해결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라면을 멀리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나의 식사는 균형을 잡아가기 시작했어요. 원래 고기를 그리 즐기지 않는 터라 과일과 야채를 골고루 먹게 된답니다. 커피를 줄이라는 누나의 말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고요. 하루 열 잔 넘게 먹던 커피가 다섯 잔으로, 1주일에 두세 번 마시던 술이 한 번 정도로 줄면서 피로가 덜하고 느낄 정도로 몸이 가벼워졌습니다. 되는대로 먹던 음식이 스스로 챙기는 것으로 바뀌자 내 몸이 비로소 내 몸이 되는 것일까요.
스님들의 생활이 이와 닮았다면 많이 오버-하는 거겠죠. 그래도 나는 이제 행자 스님 정도일까요. 이런 생각이 가끔 든답니다. 원래 소식(小食) 체질인 나로서는 독신생활을 통해 내 체질에 맞는 최소한의 섭생법을 터득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조금 부족할 때 손이 가는 음식이 지금 내 몸에 꼭 필요한 것임을 안다면 그게 약선(藥膳)이나 식이요법의 지름길 아닌가요.
이 새벽, 갑자기 바나나가 당기네요. 바나나를 맛있게 먹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