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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거지를 응대하는 북한식당 복무원의 자세

by 직관직설 2024.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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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살던 2009년 무렵, 무더운 여름날 이야기다.

 

서울에서 절친들 두 명이 얼굴 한번 보겠다고 선양에 왔다. 정말 아무 볼 일이 없었다. 그냥 둘이서 분당에서 술을 마시다가 친구 보러 갈까? 가자!” 해서 그 자리에서 항공권을 예매하고 왔단다. 둘 다 사업이 매우 바쁜 친구들이라 좀 웃기긴 해도 또 그럴만한 사이라 반가웠다.

 

중국 번시 수이동 내부 동굴
번시 수이동 내부  @  소후닷컴

우리 셋은 말 안 해도 아는 그런 사이. 내가 물에 빠지면 저놈이 무슨 짓을 할지 다 아는 사이들이다. 공항에서 나오길래 손짓을 하니 두 친구는 말없이 택시에 올랐다. 세 사람 모두 경상도 사나이들이라 말수가 아주 적고 성질들이 매우 급하다. 준비동작 없이 우리는 랴오닝성 번시(本溪)라는 그리 크지 않은 도시의 유명한 관광지인 수이동(水洞)이라 불리는 석회동굴로 향했다.

 

다들 주()당파들이라 머리 속엔 술 생각, 택시 안에서 나눈 얘기도 거의 술이었다. 어제 마신 술, 오늘 마실 술, 그런 얘기들이었다. 택시는 금세 동굴 입구에 도착했다. 전기 동력선 카누를 타고 깊은 동굴의 물길을 유람하니 무더운 날의 그 시원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즐거웠다.

 

그리고 한 친구가 압록강을 보고 싶단다. 뭐 문제 있나? 그러자. 의논하지 않는다. 택시 잡고 바로 단둥(丹東)으로 향했다. 석회동굴 위에서 떨어진 물방울들이 흰 티셔츠에 기기묘묘한 얼룩 반점을 가득 그려 놓았지만, 뭐 그런 거야 대수냐 생각하면서 그러려니 했다. 셋 다 원래 그런 성격들이니까.

중국 단둥 압록강철교 야경
단둥 압록강철교 야경  @  소후닷컴

 

노을빛에 물든 신의주는 아름다웠다. 해 지는 압록강을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배가 고팠다. 뒤편 상가들을 바라보니 북한식당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한 친구가 , 평양관이네?”하고 걸어가자, 둘은 그냥 뒤따랐다. 손님은 거의 없었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복무원 여성이 다가왔다. 그런데 왜 사람을 저렇게 째려보는지, 우리는 알지 못했다. 배가 고팠고, 주문을 했다. 복무원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세 사람 모두 식사량이 보통의 절반도 안 되는 소식파(小食派)였다. 우리가 주문한 건 달랑 세 그릇의 평양냉면이었다. 일단 배를 채우고 술을 마실 참이다. 냉면이 나오고, 감자전이 따라 나왔다. 평양관에서는 서비스 메뉴 자체가 없는 걸 아는 내가 감자전을 소반에 다시 반납했다. 문제는 이 대목에서 즉시 발생했다.

 

감자전은 제가 주방에 요청해서 따로 드리는 음식입네다!”

 

이러는 것이었다. ? 이게 뭐지? 하며 그 복무원의 눈빛을 본 순간 나는 금세 눈치를 알아차렸다. ‘남조선 거지바로 그것 아닌가. 아차 싶었다. 평양관을 수백 번 다녀 본 나로서는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사실 좀 당황했지만, 애써 마음을 수습했다.

중국 단둥의 평양관 북한식당
중국 단둥의 한 평양관  @  소후닷컴

 

강 건너 오신 지 며칠 되셨어요?” 내가 물었다. ‘남한 거지가 문제가 아니라 이 여성이 초자이겠구나!’ 이것이었다. 압록강 쪽을 가리키니 여성은 저기 압록강이요? 건너온 지 사흘 됐습네다라고 야무락지게도 대답한다. ~ 그러시구나. “, 고맙게 먹을게요라고 인사를 했다. 이 여성은 내내 벽 앞에 딱 붙어서서 우리가 먹는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자기 손님 테이블을 주시하는 건 원래 평양관 복무원들의 규칙이기도 했지만, 그 눈빛은 규칙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색깔이었다.

 

친구들이 아직 어안이 벙벙해 한다. 내가 낮은 소리로 니들 꼬라지를 봐라. 남조선 거지들아!“라 했더니 그제야 폭소가 터져 나왔다. 더 이상 식당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냉면만 먹고 일어설 친구들이 아니었지만, 거지들로서는 안주와 술을 시킬 행색도 아니었지만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이 좁은 우리에게 감자전조차 양이 많았다. 그래도 쪼개고 쪼개 나눠 먹는 친구들의 모습은 정겨웠었다. 어쨌든 우리는 의문의 1패를 당한 셈이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전날 밤의 숙취가 가시지 않아 우리는 다시 평양관으로 향했다. 평양관은 도루묵찌개가 일품이거든. 쓰린 속을 안고 뭐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오늘은 메뉴를 다섯 가지 정도 시키자고 결의했다. 속 좁은 우리로선 큰 결단이 필요했다. 남기는 한이 있더라도. 그리고 마트에 들러 한국 과자들이랑 빵도 잔뜩 샀다. 감자전 값을 할 궁리를 했다. 그 유니세프 복무원의 근심을 덜어 줄 무언가가 절실했던 것이다.

 

오전 830분께. 평양관 실내 조명은 켜졌지만 아직 문은 열리지 않았다. 우리는 식당 앞쪽 압록강 강변 광장에서 만난 중국 청년들과 공을 차면서 초조한 마음으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문이 열린다. 들어가면서 그 유니세프 복무원에게 과자가 든 큰 비닐봉지를 안겼는데 저 주시는 겁네까? 감사합네다!”라는 어색한 말투에서는 아니, 누군데 선물을?’이라는 의문형이 짙게 묻어난다. 아주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었으니 낯선 선물 제공자에게서 거지를 찾아낼 수는 없었지 않겠는가.

 

우리 계획대로 어제와 같은 테이블로 찾아가 각자 같은 자리에 앉았는데도 평양 떠난 지 사흘 된 그 여성은 음식을 주문할 때까지 전혀 알지 못했다. 카운터에서 우리를 유심히 바라보던 고참 복무원이 순간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어제 오신 남조선 분들 맞으시지요?” 그런다. 눈웃음으로 답하니, “간밤에 뭔 일인지 오늘은 통~ 몰라보겠습네다!”라며 농을 건넨다. 우린 그냥 웃었다. 그렇다. 이제 뭔가를 해야 한다. 어제 까먹은 매상을 올려줘야 하지 않는가.

 

우리를 가슴 아파하던 그 사흘째 복무원의 얼굴도 그제야 밝게 펴졌다. 무역회사를 경영하는 친구가 어제 우리가 너무 대접을 잘 받아서... 오늘은 좀 시킬게요라며 푸짐하게 주문했다. 이제 남과 북 사이에 모든 모순이 해소됐다. 말하지 않아도 다 통하는 객장 안 사정으로 그날 식당은 파티장처럼 유쾌했다. 주방 아주머니들까지 나와 우리 얼굴들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박장대소하며 간다. 물론 보나 안 보나 우리는 만취해 버렸고, 배가 터질 지경이 되고 말았다.

 

아침술이 그렇게 맛있는 줄 예전엔 미처 알지 못했다. 술에 취해 바라본 아침 압록강 풍경은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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