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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의 ‘기름진 음식’, 사마천의 지독한 패러독스?

by 직관직설 2024.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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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 흉노열전 @ 바이두백과

 인류 역사상 최고의 역사서로 평가되는 사마천(司馬遷)<사기(史記)> ‘흉노열전(匈奴列傳)’ 편에 이런 문구가 나온다.

 

젊은이들은 기름진 음식을 먹고, 노인들은 남은 부위를 먹는다.”

(壯者食肥美老者食其餘.)

 

이는 흉노족을 비하하기 위해 쓴 문구임에는 분명한데, 정말 묘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사마천이 이 글 뒤에 형제가 죽으면 형수나 제수를 취한다와 같은 내용을 덧붙여 야만적 종족으로서의 흉노족을 기록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위의 글 자체가 주는 오묘한 맛을 그냥 노인 홀대라고 치부하기엔 간단치 않은 몇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식사 자리에서 어른들로부터 난 기름진 거 싫어.”라는 말을 자주 듣곤 한다. 연로한 이에게 과도한 지방질과 기름진 음식은 혈관에 치명적일뿐더러 과다한 칼로리를 섭취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사마천의 이 문구가 이상하게 들리는 게 정상이다.

 

나는 이 구절을 읽다가 이는 사마천이 의도하고 쓴 구절임을 확신했다. 이 구절에 내포된 조금 복잡한 사정을 파헤쳐보려 한다.

 

먼저 우리는 역사가로서의 사마천과 한 무제(漢 武帝)로부터 극형을 받은 사건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가 만약 한 무제 밑에서 역사 왜곡을 일삼는 그런 속물적 역사가였다면 이 기록은 재고할 가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흉노족과 연관되어 무제(武帝)에게 생식기를 거세당하는 처참한 궁형(宮刑)을 받은 일을 잘 알고 있다. 당시 흉노는 매우 강성했다. BC 99년 흉노 토벌에 나선 이릉(李陵) 장군이 어쩔 수 없이 흉노에게 항복하고 흉노국에서 극진한 대접까지 받고 있는 상황에서 사마천이 이릉을 변호하고 나선 것이었다.

 

이에 격분한 무제는 사마천에게 궁형을 내렸다. 집안 대대로 역사가의 피를 물려받은 사마천은 사형이 아닌 궁형을 선택했다. 굴욕을 감수하더라도 역사가로 남기를 원했던 것이다. 역사는 물론 도가사상이나 천문에까지 밝았다는 사마천은 당시 세계 최강 전력의 흉노를 강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중국을 통일한 제국 한나라를 침략할 때마다 번번이 굴욕적인 복종을 강요한 흉노. 이를 막아내야 하고, 결국 흉노가 약해진 틈을 타 서쪽으로 쫓아내기까지 한 불굴의 황제 한 무제, 그리고 당대의 진실을 기록하고 싶은 사마천의 입장은 모순된다. 그러나 사마천이 쓴 기름진 음식의 역설은 무제 vs 사마천의 갈등 속에서도 절묘하게 모순되지 않았다.

 

당시 한나라 수도였던 창안(長安, 현재의 시안<西安>)을 중심으로 한 중국 중원지대와 흉노의 본거지인 네이멍구 초원은 음식문화는 물론 모든 문화 자체가 달랐다. 사마천은 우선 이 점에 주목했을 것이다. 농경문화의 관점에서 유목문화를 바라보면서 음식과 효()라는 두 가지 포인트를 마치 뫼비우스 띠처럼 교묘하게 역접시켜 놓은 것이 바로 이 촌철살인의 문구였다.

사마천  @  바이두백과

농사가 주업인 중국의 관점에서 보자면 곡식이 풍부하고 고기는 부족하며, 효도를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반면 목축과 수렵이 주업인 흉노족들은 고기가 남아나고, 사냥과 전투를 위해 청년들의 파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유목민들에게 기름진 고기가 부족하지 않다는 데 있다. 노인들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기름진 고기를 먹을 수 있으나 같이 식사할 때 기름기를 피할 수도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고기가 늘 부족한 농경민들에게는 그럴듯하게 들릴만한 문구 아닌가.

 

사마천은 농경문화와 유목문화의 차이를 잘 알고 있었고, 심지어 흉노에 대한 지식에 아주 밝았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그는 그 누군가가 이 구절을 읽고 기가 막혀 박장대소하면서 무제의 압제 아래에서 억울하게 글을 쓰는 자신을 알아주길 간절하게 바랐을 수 있다. 내가 사마천이었다면 명예 회복을 꿈꾸며 나를 위한 한 권의 <사기>를 따로 썼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사마천의 패러독스(Paradox). 궁형까지 당한 그로서는 이 지독한 패러독스를 자신의 역사서 한 귀퉁이에 숨겨 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우리에게도 상식이며, 유목민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기름진 음식의 패러독스를 후세의 역사가들은 주목하지 않고 있다. 역사상 최고의 사가(史家)라는 평가에도 흉노를 비난한 역사가로 남겨진 사마천의 억울함이 풀리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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