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몰입이 안 될 때 그는 가끔 삑삑~거리는 소리를 내곤 한다. 몰입이 되면 그는 완전한 하나의 악기, 마두금(馬頭琴)의 음색을 낸다. 주현미의 음색은 완벽하게 마두금을 빼닮았다.
많은 노래와 가수가 백 년이 지나고 훌륭한 노래, 매력적인 가수로 남을 수 있겠지만, 장담하건대 주현미처럼 감정선(感情線)의 테두리를 풍부하게 채울 수 있는 음색으로 오래 남기는 어려울 것이다.
마두금 소리를 가슴으로 들어 보면 동양인의 감정을 저렇게 잘 표현하는 악기가 있을까 생각된다. 몽골에서는 얼후(二胡) 또는 머릉 호르(Морин хуур)라 불리는 전통 현악기다. 우리에겐 그와 흡사한 해금이 있지만 소리가 다르다. 두 줄 현에서 울리는 마두금의 소리는 저음에서는 울림이 풍성하고, 고음에서는 애달프다. 주현미의 노래가 바로 그렇다.
마두금의 음색
저음 대역에서 풍부한 감성을 자극하는 울림이 있다는 것. 트로트 가수가 아니라면 아주 특별한 일은 아니다. 몇 년 전 <트롯신이 떴다>에서 그가 부른 정용화의 <어느 멋진 날>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아주 다른 그의 음색을 만나게 된다. 한 가지 흠은 있었다. 잘 참아내다가 마지막엔 그 특유의 감성이 넘쳐버린 노래였지만, 억제되었더라면 완벽한 명곡이 될만했다. 명곡은 다른 문제이고, 감동으로서는 최고였다.
만약 그가 발라드 가수였더라면 정말 세상을 눈물바다로 만들 뻔했다. 사실 그는 트로트보다 발라드에 더 맞는 음색을 지닌 가수다. 무슨 말인가 묻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세상에 저렇게 노골적으로 슬픔을 드러내는 트로트 가수는 없다. 트로트는 그런 장르가 아니다. 무슨 노래를 불러도 슬픈, 그런 주현미 자신도 덜 빠른 템포로 느슨하게 감성을 풀어놓는 노래를 꿈꿔 왔을지도 모른다.
트로트에서 보지 못한 쿨앤웜(Cool & warm) 모드를 <어느 멋진 날>에서 그가 보여줬다. 사실 우리가 아는 주현미와 발라드의 조합 자체가 폭력적 결합 아닌가. 그렇지 않았다. 마치 그는 트로트에 묶였던 사슬이 풀린 야생마처럼 발라드의 초원으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빠른 템포로 굽은 내리막길 달리듯이 넘어가는 트로트에서 그의 감정선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지닌 감성은 워낙 독특해 멜로디와 리듬이 지배하는 트로트에서조차 묻히지 않고 드러났다. 그러나 발라드에서 그는 느리게 흐르는 감정선을 따라 자신 특유의 감성을 섬세하게 드러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소울이나 발라드 노래를 불러보면 어떨까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터였다. 주현미에게 발라드는 모험이 아니었다. 발라드에 스며든 주현미 특유의 감성이 곡 전체에서 빛났다. 특히 후반부 고음 영역에서 절규하는 듯한 그의 연주는 발라드의 감정 영역을 폭넓게 보여줬다. 그래서 정말 멋진 날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xwz-MhGYbg&list=RDfxwz-MhGYbg&start_radio=1
그런 이유들로 우리는 그를 노래 잘하는 가수로 보아선 안 된다. 하나의 감정 동일체(感情 同一體)로 보아야 한다. 노래를 해도 우는 듯하고, 그냥 울어도 노래가 될듯한 그런 감정 동일체로서의 음악적 아이덴티티를 그는 가졌다. 그 동일체의 중심에는 아주 호소력이 강한 뼈대가 있고, 외연에는 매우 섬세한 피질이 감싸고 있다. 그래서 그의 감성은 강하면서도 부드럽다. 특히 구 소련 시절 사할린 공연에서 그가 불렀던 <사할린>은 울음소리와 절규 그 자체였다.
<비 내리는 영동교>.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 순간부터 그만의 감정 영역이 ‘주현미’라는 새로운 장르로 자리 잡았다. 젊은 시절 어느 날 대구 복현동에서 밤거리를 걷다가 한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발길을 멈추고 한참 그 화면에 빠졌던 기억이 있다.
사람이 저런 소리를 내다니. 이미자도 아닌데. 음색이 아주 독특했다. 좀 더 예뻤으면, 사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저 지나가는 가수 정도로 생각했던 탓이기도 했지만, 노래가 너무 좋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너무 긴장한 그를 보는 우리도 가슴 졸였던 기억이다. 그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세 번째나 됐을까. TV 속에서 그는 갑자기 미인으로 변해 있었다. 그의 음색은 모든 걸 빨아들이고, 보는 사람의 감정까지도 완벽하게 지배하는 힘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배자일 뿐 그만의 감정을 제대로 우리에게 옮겨주진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그냥 노래 잘하는 가수였다. 여전히 그에게 노래는 노래일 뿐이었다.
이십여 년이 지났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긴장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주현미로 돌아왔다. 그저 놀라움이었다. 그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전에 보았던 다듬어진 안무의 어깨춤이 아니었다. 완벽하게 음정을 소화하려는 강박관념이 없어진 주현미는 그 주현미가 아니었다. 성대로부터, 가슴으로부터, 그게 아니라 자신을 온전하게 노래에 실었다. 주현미의 스테이지-2 시대가 열렸다고 평가해도 손색이 없다.
최근 노래 중에서도 감성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꼽으라면 tvN <회장님네 사람들>에서 <전원일기> 출연진 여섯 명의 관객 앞에서 부른 몇 곡의 노래들을 서슴없이 말하겠다. 진짜 노래를 즐기는 주현미를 보여줬다. 노랫말 한마디 한마디가 감정에 닿아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성량을 한껏 올려 힘을 싣고 싶은 소절에서는 마음껏 힘도 실어 본다. 하고 싶은 대로 해보려는 모습이었다. 저렇게 즐겁게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왜 그리 마음 졸이며 불렀을까. 가수가 아닌 감정 동일체로 그가 돌아온 것이었다.
4년 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트롯신이 떴다> 공연에서 그가 보여준 ‘설렘’은 마치 새로 데뷔하는 가수의 그것처럼 보는 이들까지 떨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워낙 솔직한 성격이라 그의 목소리나 동작 하나하나는 보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이된다. 하노이에서의 보여준 그게 그의 본 모습 아닐까.
20대 시절이었더라면 하노이 길거리 무대 정도에 떨었을 그는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인가. 온전하게 영혼까지 실린 그의 노래는 처음 듣는 관객들에게도 익숙한 울림을 준다. 설령 그게 트로트를 처음 듣는 베트남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세상에 슬프지 않은 사람은 없다.
아들과 함께 <하숙생>을 부르던 날 눈물을 흘리던 그를 보았는가. 어디 그의 눈물이 그 날 뿐이었겠는가. 어쩌면 그는 수십 년 노래를 부르는 매 순간 울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터질 듯 터질 듯하던 울음이 그날은 아들 앞이라 왠지 제대로 터졌을 뿐이다.
요즘 그는 노래 유튜버로 나섰다. 뜬금없이 신선했다. ‘주현미TV’에서 그는 자신의 옛날 노래나 다른 가수들의 노래를 부른다. 눈에 띄는 점은 반주를 아주 간단하게 매칭한 것이다. 관객이 아닌 자신의 감정과 목소리에 집중하고 싶었던 걸까. 담백한 넋두리 같은 느낌이랄까. 그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여러 가지 노래에 자신만의 감정을 실어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손에 잡히는 대로 느낌이 닿는 대로 부르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자신만의 감정 영역을 다양한 노래의 범주를 통해 넓혀보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어떤 형식으로든 기록해야 할 가치를 가진 것이 바로 아무도 흉내 내기 어려운 마두금을 닮은 그만의 감성이다.
주현미는 그래서 이 시대 모든 이들의 카타르시스다. 또 그는 우리 내면의 슬픔을 다스리는 지배자다. 노래를 멈추지 않는 그이기에 우리는 아직 몇십 년 더 그의 지배를 받고 싶어진다.
왜일까. 그가 쉬지 않고 슬픔을 연주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당분간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마두금의 소리처럼 슬프게 흘러갈 것처럼 보이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