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중국이야기:: 소수민족 시버족 친구 "우린 한 핏줄이잖아!"

by 직관직설 2024. 5. 19.
반응형

가족들과 함께 중국 선양(瀋陽)에 살던 무렵 겪었던 중국 소수민족 친구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아마도 2010년쯤으로 기억된다. 압록강에 접한 랴오닝성 환런(桓仁)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한국 사업가 친구들과 중국 사업가 친구들이 열 명 정도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가 있었다. 만주족 자치현이라 만주족 손님들이 많았었는데 그 중에 우리 친구들과 동년배인 시버족(錫伯族) 사업가가 끼어 있었다.

 

끼어 있었다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다. 시버족은 전체 인구가 8만여 명밖에 안 되는 글자 그대로 소수민족이어서 그 자리를 함께 한 만주족 손님들조차 놀라워했기 때문이다. 우리말로는 보통 석백족이라 부르는데 시버(Xibe)족 또는 시보(Xibo)족이라고도 불린다. 선비족의 선비(鮮卑)에서 변형된 말이라는 설이 있다.

 

그는 대뜸 반색을 하며 술잔을 맞댈 때마다 한국에 대해 궁금한 걸 묻거나 남다른 호감을 보였다. 그런데 중국말을 할줄 아는 사람이 나밖엔 없던 터라 내가 주로 대화든 술이든 응대해야 할 처지였다. 나도 중국어가 그리 능숙하진 않아 필담을 섞어야 했는데 그가 열렬한 팬을 자처하는 가수 이정현이나 소녀시대 얘기 같은 시시콜콜한 주제에 조금 피곤하다고 여겼다. 두어 시간 지나 술이 얼근히 취한 그가 본색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워낙 기세가 셀 때여서 민족문제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중국인들에겐 민감했던 이유다. 그러나 상당히 지식이 풍부한 그는 민족을 숨기지 못하고 폭발하고야 말았다.

 

시버족과 한국인은 원래 같은 핏줄이야! 고구려 때 한 나라에 살았으니 우린 모두 같은 가오리빵즈(高麗棒子)잖아!”

 

취한 그는 너무 격하게 외쳤다. 가오리빵즈란, ‘고구려 놈들 몽둥이란 뜻으로 중국인들이 한국인이나 조선족을 경계하거나 비하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이 왜 민감하냐고 여길 분들도 있을 테다. 고구려가 자신들 역사라고 우기는 중국인에게 가오리방즈란 말 자체가 이민족을 일컫는 셈이니까 그렇다. 어쨌거나 우리는 그날 밤 가오리빵즈를 외치며 수없이 잔을 맞대고, 또 노래를 목놓아 불렀다. 그 나머지 기억은 없다. 모두 쓰러져 버렸으니까. 그날의 바이주(白酒)는 독하고도 달콤했었다.

 

그는 자신이 옌(Yan) 씨라고 했다. 아쉽지만 이름까지 기억하진 못한다. 나중에 찾아보니 시버족 성씨 중에 옌 발음은 엄(), () 두 개가 있었다. 뭐든 그는 옌 씨라 통칭하기로 한다. 그가 내게 특별한 기억을 남긴 이유는 이거다. 보통 중국인들, 특히 소수민족들은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모르거나, 알더라도 정치적인 이유로 깊은 내막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몇 번 망설이는가 싶더니 거침없이 말하고, 아주 격정적으로 토로했던 것이다. 그것은 용기라기보다는 오래 깊이 묻어 두어 임계점에 도달한 어떤 절박함에 가까웠다고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가오리빵즈 타령은 다음 날 아침에도 후속편으로 이어졌다. 작정이나 한 듯이 대뜸 고구려 첫 도읍지이자 천하의 요새로 알려진 오녀산성(五女山城)에 같이 가자는 거였다. 마치 조상들의 도읍에 성지순례라도 하자는 셈이었을까. 제법 큰 부동산 개발회사 오너였던 그는 휴일임에도 이른 아침부터 직원들을 깨워 벤츠를 여러 대 몰고 나와 전날 술 전투에 지친 일행들을 산성 앞까지 끌고 갔다.

 

오녀산성 @소후닷컴

 

나는 등산을 좋아했지만 날이 많이 더웠던 데다 여전히 숙취가 심해 그리 내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너무나 지극한 그의 손에 이끌려 좁은 암벽으로 난 산성 길을 꾸역꾸역 올라갔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산행 내내 그는 정말 간절한 말로 거듭 동족애를 표현했고, 산에서 내려와 점심식사를 하면서도 애틋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동족애는 자신이 핏줄에 대해 가졌던 대단한 갈망이었다. 그의 말을 유추해 보자면 13억 인구 중에서 8만 명에 불과한 최하위 소수민족으로 살아오면서 켜켜이 쌓였던 감정들이 고대에 동족이었던 한국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화산처럼 터져 나온 것으로 보였다. 십수 년이 지났건만 그의 애틋했던 감정은 지금까지도 숙성된 술 향기처럼 내게 진하게 남았다.

 

청나라 당시 시버족 @소후닷컴

 

글로만 접하는 분들을 위해 부연하자면 원래 랴오닝성 선양시 근처에 살았던 시버족은 고대 흉노족의 후예인 선비족의 후손들로서 대륙에서는 고난과 멸시를 가장 심하게 겪어 온 소수민족이다. 시버족들은 뛰어난 전투 민족으로 이름나 청나라 때에도 팔기군(八旗軍)에 편입되어 전과를 올렸는데, 같은 이유로 청나라 말기에 대거 동북지방에서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차부차얼(察布查尔), 이리(伊犁) 등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어 변방을 지키는 민족으로 전락했다.

 

이렇게 고된 민족 역사는 세계적으로 매우 특이한 디아스포라로 기록될 정도다. 그래서 한국이 메달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올림픽 양궁에서 가끔 중국이 금메달을 땄다 하면 시버족인 경우가 많았다. 우연이 아니다.

 

특히 한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통리야(퉁리야/동려아, 佟丽娅)라는 시버족 여배우는 외모로만 봐도 보통의 중국 배우들과 달리 한국인과 많이 닮았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는 작년에 중화권 올해의 인물 만찬스타일링 화보 주인공에 뽑히기도 했다. 중국 영화계에서는 드물게도 그는 감정연기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것도 우연일까.

 

시버족 여배우 통리야 @소후닷컴

 

나는 이 글에서 주로 오래된 개인적 사연을 소개했지만, 조금 다른 생각으로 이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한다.

정치는 정치인들의 전유물일 수 있고, 때로는 그들이 역사나 문화까지 그들의 것으로 잠시 전유(專有)할 수도 있지만, 핏줄에 흐르는 그 무엇과 사람의 가슴에 있는 갈망까지 지배할 수는 없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