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을 기다리며...’ 초조한 김정은
사진은 19일 새벽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평양 순안공항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기다리는 장면이다. 원래 지각 대장인 푸틴은 예정 시간보다 4시간 정도 늦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김정은으로부터 ‘초조함과 절박감’ 두 가지를 읽을 수 있었다.
크램린궁 발표에 의하면 이날 푸틴은 새벽 2시46분 전용기에서 내렸다. 양국 국가 연주 같은 세리머니는 없었다. 이는 김정은보다는 손님인 푸틴이 세리머니를 생략하기로 결정했을 법한 상황이다. 새벽 2시라도 김정은은 팡파르를 울리고 싶었을 테다. 그러나 러-우 전쟁으로 지지율을 조금 올린 푸틴은 EU 전체를 적으로 만든 터라 팡파르까지 받기엔 민망한 형편이었다. 그리고 푸틴은 만 하루가 조금 못 되는 21시간 남짓 북한에 머물고 베트남으로 떠났다. 두 독재자는 밤을 지새우며 우의를 다지고, 많은 얘기를 나눴을 것이다.
지금 두 사람의 표정은 밝고 기대에 찼지만, 배고프고 목마른 자가 물을 들이킨 표정이다. 여전히 배가 고픈 것이다. 북한과 러시아는 지금 모두 벼랑 끝에 서 있다. 사면초가란 말이 딱 맞다. UN 제재로 고사 직전까지 간 북한과 우크라이나 침공 후 출구를 찾지 못하는 러시아가 어쩌면 주변 국제정세나 체면 불구하고 이날 번개팅처럼 만났다고 표현해도 무리가 아니다. 여기서 국제정세란, 껄끄러워하는 중국과 단단이 벼르는 미국, 북-러를 보는 우리 한국의 가시 돋친 경고 등을 말한다.
“얻을 게 많아도... 모두 절박한 것들뿐!”
김정은이 푸틴으로부터 기대하는 것은 명백한 상황이다. 밀과 위성기술과 수호이-35 전투기 정도로 보고 있다. 얻을 게 분명한 기다림과 초조함이었다. 이 가운데에서도 4.5세대 전투기인 Su-35에 대한 기대가 높다는 관측이 나오는 것은 그만큼 열악한 북한의 공군 실태를 보여준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전투기 기체만 온다고 북한 공군이 바로 업-그레이드 될 일은 아니지 않는가. 북한에게 4.5세대 전투기란 사치품 수준이다. 엄청난 제트유 확보도 문제지만, 몇 대를 들여오든 풀-세트의 정비 플랫폼과 함께 레이더, 위성 자산 등과 결합해야만 전투 플랫폼이 완성된다. 구닥다리 전투기와는 의미 자체가 다르다. 그래서 사치품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래도 북한에게 식량이든 무기는 좋다고 본다. 이 다음이 문제다.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공병을 참전시키는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아낌없이 준 포탄보다 병력을 주겠다는 것이다. 물론 공병은 지원 병력이지만 의무병과는 다르다. 직접 타격 타깃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 북한은 이것저것 가릴만한 여유가 없이 러시아가 원하는 건 다 주겠다는 것 아닌가.
이렇게 길잃은 김정은과 푸틴이 평양에서 22시간 번개팀을 하는 동안 평양 밖에서는 속 터지는 소리가 연 발로 터져 나오고 있었다. 과연 두 사람의 평양파티가 파티로 끝날 것인가에 대한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중국 보란 듯 내걸린 김일성광장의 푸틴 초상화
이날 평양 김일성광장에는 김 위원장의 할아버지 김일성과 아버지 김정일의 사진이 붙었던 자리에 푸틴의 사진이 걸렸다. 매우 이례적인 일이며,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이 장면을 보는 중국의 속내는 복잡하다. 이번 평양파티에는 많은 암시적 경고가 숨겨져 있다.
김일성광장에 걸린 푸틴-김정은 사진 @ 조선중앙방송
사실 이미 중국은 중국 내 북한 외교관들의 마약 거래와 금괴 밀수 등을 단속하거나 다양한 외교적 루트로 평양에 경고성 메시지를 보내왔다. 김정은은 여기에 아랑곳없이 푸틴에게만 올-인한 셈이다. 거기다가 중국은 다롄 해변도로에 김정은과 시진핑이 함께 찍었던 발자국 동판 기념물까지 콘크리트로 덮어버린 후이다.
과연 중국과의 파국이 여기서 끝날 것인가? 아니다. 북한의 전통적인 외교 전략은 한 번 틀어지면 일단 벼랑 끝까지 몰고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쉽게 태도를 바꾸지 않고, 상대를 거의 항복 수준까지 압박한다. 외교 일각에서는 북-중 관계가 장성택 처형 이후부터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추락했다는 평가다.
고민 없는 김정은의 질주가 시작되면서 중국의 고민이 시작됐다. 중국은 북한에 대해 많은 카드가 있지만, 쓰기에 적합한 카드가 없어 궁색한 형편이다. UN 제재로 대북 물자 지원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라 끊고 말고 할 카드가 성립되지 않으며, 중국 내 탈북자 송환 문제나 인권 문제도 건드리면 두 나라 모두 궁지에 몰리는 그런 자승자박 카드다.
중국에게 ‘두만강 개방’이 뜨거운 감자인 이유
여기서 북한이 중국에 대해 낼 수 있는 최강의 카드가 있다. 바로 ‘두만강 하구 개방’이다. 이미 중국과 한국 언론을 통해서도 그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두만강 하구로부터 훈춘까지의 물길을 열어 중국이 내륙에서 동해-태평양으로 뱃길을 여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러시아의 북극 항로 개척과 맞물려 파괴력이 매우 큰 고강도의 카드이다. 북한은 이 카드를 숨긴 채 러시아에 바짝 다가간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달콤해 보이기만 하는 이 카드가 중국에겐 왜 최강의 뜨거운 감자일까? 이것은 바로 지금 중국을 보는 북한과 러시아의 눈길이 곱지 않다는 데 뜨거운 이유가 숨어있다. 중국이 이 카드를 받게 된다면 중국 무역선이나 군함들은 매번 두 나라 눈치를 살피며 두만강을 오가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그토록 간절하게 원했던 두만강 하구는 딱 절반씩 북한과 러시아가 공유하는 수역이다. 그나마 관계가 좋던 과거와 전혀 다른 상황이다. 먹기엔 뜨겁고, 안 먹기엔 너무나 아까운 먹잇감이 바로 두만강이다. 중동에서조차 해양 진출을 위해 일대일로를 외치며 부두를 건설하고 동분서주해 온 중국 아닌가. 중국에게 동해는 사막의 단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애써 준설작업과 항만시설 구축공사를 끝내고 나면 중국에겐 북한과 러시아에 목매는 상황이 기다리고 있다.
두만강은 자유 진영에게도 뜨거운 카드다. 이 강이 열리는 순간 동해는 한마디로 뜨거운 바다로 바뀐다. 아마도 한국과 일본은 본격적인 항공모함 도입과 핵잠수함 건조에 착수할 게 자명하다. 서해와 남중국해 상황과는 다르다. 특히 일본의 안보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갈 것이 확실하다. 중국의 바다를 봉쇄한 섬들의 라인인 이른바 도련선(島鏈線, island chain)의 출발점이 지금의 서해 백령도에서 일본 홋카이도로 확장된다.
일본은 미국과 함께 동해에 해군력을 보강하여 봉쇄하려 들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중국 해군은 이를 피해 러시아 사할린 근해를 통과해 북태평양으로 진출하려 할 것이다. 두만강 개방은 동북아시아에 새로운 핫-이슈로 보상해 결국 무리한 군비 경쟁과 외교적 부담을 초래할 개연성이 매우 높다.
지금 미국은 일본, 한국, 타이완 등과 동북아시아 안보 상황에 대해 긴급 대비책을 마련할 움직임이다. 한국은 대통령실 발표와 러시아 대사 초치를 통해 우크라이나에 한국산 무기 제공을 염두에 두고 강력한 경고에 나선 바 있다.
자, 이렇게 정리해 보자. 이번 평양파티는 결과적으로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만 김-푸틴 두 사람의 갈증을 푸는 이벤트일 뿐. 갈증을 풀고 나니 배고픔이 기다리는 형국이다. 두 나라는 지금 세계적인 고립의 끝에 서서 자력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북-러 관계, 특히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우크라이나 파병과 두만강 개방이라는 이 최강의 카드는 모두 핵 개발만큼이나 파괴력이 크다. 우크라이나 확전 가능성이나 동해 긴장 조성은 관련국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면서 동시에 북한을 더욱 극한의 국제적 고립으로 몰고 갈 명분으로 작용할 것이다.
과연 세상과 더 높은 담을 쌓은 지금의 북한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인가, 그것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다급한 북한으로서도 이 점을 되짚어 보는 것이 다음 수순이 될 것이다. 그것이 우크라이나든 두만강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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