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살아본 경험으로 보면 중국 정부는 물론 거의 모든 중국인들이 고구려를 중국의 속국이라 인식한다.
동북공정. 전체주의 사회의 특성을 이해하지만 아무리 국가가 그런 정책을 표방하더라도 소수의견조차 거의 볼 수 없는 그런 사회일 줄 누가 예상하겠는가?
중국 선양에 살 때 열차를 타고 먼 여행을 하다가 중국 대학에서 중국 역사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다는 한 청년을 만났다. 옆자리에서 청년의 노트북을 들여다보다가 나 역시 지루함을 못 이겨 말을 걸었다. 청년은 노트북에 열심히 랴오허(遼河)문명에 관한 글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네이멍구(內蒙古) 쪽으로 답사를 떠나는 길이란다.
자연히 화제는 역사에 맞춰졌다. 아니나 다를까 ‘고구려’에 대한 이야기가 논쟁의 불씨를 당겼다. 처음엔 중국에서 민감한 역사 논쟁이냐며 대충 들어보려 했지만, 듣자 하니 슬슬 열이 났다. 동북공정이 그렇듯이 이 친구 얘기는 아주 간단했다. 현재 중국 땅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는 중국 역사다, 이런 거였다.
그때 열차 안 논쟁에서 내가 했던 몇 가지 질문들을 간추려 보려 한다. 물론 그 친구는 그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못했다.
첫째, 만약 고구려가 중국 역사라면 왜 지금도 한국인들에 대해 욕할 때 ‘가오리빵즈’라 하냐?
가오리빵즈(高麗棒子)란, ‘고구려 몽둥이’란 뜻인데 비속어로, 한국인들과 조선족들이 자주 듣는 욕설이다. 가오리는 고려(高麗)인데 고대 고구려도 고려란 국명을 썼기 때문에 아직도 고구려에 대한 공포심을 잊지 못하고 한국인이나 조선족들에게 그런 욕을 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 친구는 답할 수 없다. 이 욕설로 보자면 지금도 한국인이 고구려 사람인데 왜 고구려가 중국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이것은 민족과 영토의 범주에 관한 동북공정의 자기모순 아닌가.
둘째, 그런 의미에서 고구려도 고려이고, 그 나라를 계승한 나라도 고려이고, 지금 한국을 지칭하는 영어 국명도 코리아(Korea)인데 왜 자꾸 고구려가 중국 속국이라 말하느냐?
역시 대답하기 궁색한 질문 아닌가. 그렇다 차이나는 원래 진나라에서 온 국명이고, ‘지나’의 변형어이다. 간혹 유럽에서는 키타이(Kitai)라 불렀고, 이는 거란(契丹)을 일컫는 말이다. 홍콩의 항공사 케세이페시픽 이름도 키타이에서 따온 것이다. 지금 중국의 정확한 원어 국명은 ‘중궈’이다. 그런데 계속 국명을 바꿔 온 중국이 고구려로부터 이제까지 일관되게 고려-코리아라 불리는 우리 선조의 나라를 자기 나라였다고 우기는가.
셋째, 내가 다시 물었다. 만약 자기 나라 땅에서 이루어진 역사가 모두 그 나라 역사라면 미국의 역사는 몇 년이냐고?
그 친구는 2백3십 몇 년 아닌가 라고 말했다. 내가 말했다. 미국 역사는 2만3천년이라고. 인디언 역사도 미국 역사 아니냐고 되물으니 그 친구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내가 그랬다. 왜 중국은 그렇게 계산하고, 미국은 다 빼고 계산하냐고?
넷째, 그럼 연개소문은 누구 조상이냐고 물었다.
이 친구는 더 이상 대답할 의욕 자체를 잃고 말았다. 내가 그랬다. 왜, 너희들 경극(京劇)에도 연개소문이 나오지 않냐고? 나온단다. 경극은 원래 청나라 때 유행한 베이징 지역의 연극을 말하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연개소문은 당 태종 이세민을 죽이려고 쫓아온 백두산 부근 출신의 신화적 장수로 묘사된다.
만약 고구려가 당나라의 조공국이었다면 왜 이세민은 그렇게 당하고 또 도망을 다녔겠냐고. 결국 이세민은 겁을 집어먹고 멀리 도망을 갔으나 연개소문이 따라잡아 수색하던 중 어느 우물 속에 숨은 이세민을 찾다가 거미줄이 처진 걸 보고 여긴 아니겠구나 하고 가는 바람에 겨우 살았다, 뭐 그런 얘기가 경극의 줄거리다.
다섯째, 무려 7백년 이상 존속한 고구려가 어떻게 겨우 289년 간 유지하고 망한 당나라의 속국이 될 수 있냐고?
고구려는 당나라 이전 수나라도 쳐들어왔다가 38년 만에 망하고, 뒤이어 당나라도 여러 번 전쟁에서 참패하고 겨우 망할 무렵 단 한번 이긴 것뿐인데 마치 조공국처럼 말하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다.
더욱 기가 차는 것은 고구려는 기원전 1세기부터 시작된 나라이고, 당나라는 618년, 수나라도 581년에 세워진 나라다. 세상에 종주국보다 먼저 생겨난 제후국이 있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그러면 고구려의 종주국은 어느 나라란 말인가. 고구려보다 조금 먼저 생긴 한나라 역시 후한까지 치더라도 3세기 무렵 망한 것을.
여섯째, 그렇게 궁금하면 유전자 검사를 하면 된다고 말해 줬다.
그렇지 않나. 검사는 하나 마나 겠지만 내 거, 니 거 싸울 일이라면 소수민족마다 표본을 정해 유전자 검사를 하는 게 아주 쉬운 해결책 아니겠는가.
이미 많은 유전자 검사 결과 연구에 의해 Y염색체의 이동 경로 자체가 밝혀진 게 많다. 특히 일본 학자들이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적어도 중국 북부와 시베리아에 사는 어룬춘족(鄂倫春族), 시버족(시보족, 錫白族), 미아오족(苗族), 그리고 고구려 후예일 것으로 추정되는 티베트족(시짱족, 西藏族)과 여진족의 후예로 고구려의 한 종족이었던 허저족(赫哲族)은 우리와 동족일 개연성이 높다는 게 통설이다. 당연히 만주족과 신라와 고구려의 후예라 자칭하고 있다.
일곱째, 자국 영토의 역사는 모두 자국 것이라 하는데, 만약 중국이 미국이나 러시아에 합병된다면, 또는 한국에 합병된다면 중국 역사가 온전히 그 나라 역사가 되는가?
동북공정의 논리대로라면 그렇게 되어야 한다. 역사가 정말 그런 것인가. 만약 러시아가 중국을 차지했을 때 러시아인들은 중국 역사를 식민지 중 하나의 역사로 기록할 것이 분명하다. 몽골이 중국을 차지했던 원나라를 자신들의 역사에 포함시키는 것과 그 이전의 중국 역사를 몽골인들의 역사와 별개로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역사는 공간이나 범주의 개념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해 보자.
국가를 정의하는 요소는 혈통을 중심으로 한 민족과 언어, 문화, 그리고 영토와 같은 것들인데 영토 하나만으로 고집한다면 곤란하다. 엄밀하게 말하여 역사는 국가나 공간 개념이 아니라 민족을 근간으로 성립한다. 우리는 영토에 대한 욕심이 적다 하더라도 그 모든 요소들을 아울러 본다면 원래 만주와 한반도는 우리 민족 고유의 영토이자, 문화적 터전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왜, 중국은 구태여 동북공정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불리한 논란을 만드는지, 합리적으로 이해하기란 힘들다. 비단 소수민족의 통일적 사상을 중화주의 역사관으로 정립하고 싶다면 그야 우리가 관여할 바가 아니지만 고구려나 김치, 한복, 대보름 축제까지 모두 중국의 문화라면 그 문화는 고대 동이족의 문화였음을 누구나 다 인정하는 것이란 점에서 모순으로 치닫고 만다.
주변국들과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켜 온 중국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공생의 길을 찾을 필요가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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